오랜 세월 마루 한 편짝 벽에 서 있는 케케묵은 책장 속에서 박범신 의 장편소설 풀잎처럼 눕다..가 빛바랜 모습으로 무료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드르륵 유리문을 열고 책을 펼쳐 한 눈에 들어 왔던 글씨를 미간을 찡그리며 맨 뒷장을 보니 1986 년 4월 15일에 초판이 발행된 후 1990년 2월 10일 까지 무려 15판이 발행되었다
하얗던 종이도 누렇게 변했고 오래된 책만이 간직한 특유의 뭉뭉한 냄새가 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붙들 수도 없는 세월을 아까운줄 모르고 대충대충 살며 야금야금 까먹기만 했던 그 시절은 참 빛나는 나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때엔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순간순간 들이었겠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는 건 최선보다는 후회스런 일들만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학문으로는 배울 수 없는 지혜를 터득하기도하고 한참 짱짱했던 그 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으로 살았지만 지금의 나이를 살아내고 보니 앞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저절로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어쩌면 생의 경륜이 아닐까 싶다 영원하고 아득할 것만 같았던 세월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훌쩍 뛰어 넘어 지금에 이르러 언젠가는 풀잎처럼 누울 날이 오리라.
사진으로 쓰는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