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부석사(浮石寺)의 본전(本殿)으로서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그후 몇 번의 중창(重創)이 있었고, 조선 광해군(光海君:1608∼1623)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추녀의 네 귀를 8각 활주로 받쳐주고 있다. 전면(前面) 기둥 사이에는 중앙어간(中央御間)과 양협간(兩夾間)에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단간(端間)에는 창문을 달았다. 기둥에는 알맞은 배흘림이 안정감을 주며 간결한 두공(枓栱 )과 우주(隅柱)에 보이는 귀솟음 수법은 건물 전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자잘한 정자살 분합문 위에 시원스런 포벽(包壁), 그 위에 가늘고 긴 기왓골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불전(佛殿)은 1916년의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76년(고려 우왕 2)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조수법이나 세부양식이 묵서명 연대의 건물로는 볼 수 없고, 적어도 13세기 초까지 올려볼 수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같은 경내에 있는 조사당(祖師堂)이 1377년(고려 우왕 3)에 건립되었다는 묵서명이 나왔고, 이 건물과 비교할 때 100년 내지 150년 정도 앞섰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기둥을 만드는 방법에는 보통 민기둥과 배흘림 기둥이 있습니다. 배흘림 기둥이란 것은 아래에서 3/1 지점이 가장 볼록하게 두껍고 아래가 그보다 조금 가늘며 위는 가장 가는 형상의 기둥다. 이렇게 해 놓으면 보기에도 안정감을 가지게 되고 미관상도 훌륭해 진다 맞배지붕을 사용하던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의 정전 등 목조건축물에서는 대부분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말에 팔작지붕이 들어오면서 부터 배흘림 기둥을 사용하는 빈도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말까지도 배흘림 기둥이 사용이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도 이러한 배흘림 기둥이 돌기둥으로 사용이 되었는데 엔타시스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러한 배흘림 기둥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다. 혜곡 최순우 선생님께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쓰셨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를 보면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란 글이 나온다 최관장님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저물어가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며 사무치는 마음으로 이같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기신 조상님께 감사드린다는 표현이 그 저변에 깔려있다 즉 조상들의 문화에 대한 태도에 경외심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명필로 유명한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영주 부석으로 왔을 때 직접 어필한 현판
사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