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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이야기

선묘낭자의 숭고한 사랑

by 비 사랑 2010. 11. 29.

중국의 <송고승전(松高僧傳)> 제4권 ‘의상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문무왕 1년(661년), 의상스님이 당시 중국에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산동반도 등주에 도착해 한 불교신도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집 주인에게는 선묘라는 딸이 있었는데 의상스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 사모하는 마음이 싹텄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선묘낭자의 애절한 사랑을 뒤로 하고 장안에 있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간 화엄불교학을 공부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의상스님은 처음 당나라에 왔을 때 자신에게 후의를 베풀어 주었던 선묘낭자 집을 찾아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염불삼매에 잠긴 선묘의 뒷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려 선창으로 나가 배를 타고 신라로 출발했다. 뒤늦게 의상스님의 행적을 안 선묘낭자는 미리 마련해 둔 스님의 법복을 갖고 선창가로 달려 갔으나 신라로 가는 배는 이미 떠나버리고 없었다. 그래서 옷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이 몸이 용이 되어 스님이 타신 배를 호위하리라”라며 검푸른 물결 속에 몸을 던져 의상스님을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선묘각에 안치된 선묘상. 의상의 뛰어난 풍모에 반한 선묘는 오랜 세월 동안 의상을 뒷바라지했는데, 일제시대 개수공사를 할 때는 석룡으로 변한 선묘의 허리통이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의상스님은 화엄도량 부석사를 창건하기 위해 이곳 봉황산 기슭에 큰 절을 지으려고 했다. 그 러나 이곳을 미리 점거해 살고 있던 무리들이 방해하자 선묘용(善妙龍) 이 나타나서 큰 바위를 공중에 세 번이나 들어올리는 신기를 보여 무리들을 쫓아버렸다. 이 선묘용은 석용(石龍)으로 변해 길이길이 스님의 법을 받들기로 했다. 부석사 도량을 지키기 위해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불좌상 아래 머리를 두고 몸체는 무량수전 바깥 왼편에서 앞으로 뻗어 꼬리 부분을 석등 아래에 묻는 등 지금까지 부석사를 지키는 기둥이 되고 있다. 1916년 부석사 보수공사를 할 때 일본인들이 이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무량수전 앞뜰을 파헤쳐 보았더니 실제 용의 형상을 한 바위가 길게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석용을 그대로 두면 일본에 해가된다 하여 정으로 허리 부분을 쳐서 끊어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창건 당시 선묘용이 들어 올렸던 커다란 바위는 무량수전 뒷편 바위 위에 올려져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큰 바윗돌 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집처럼 덮혀 있어 언뜻 보면 서로 맞닿아 붙은 듯 하나 자세히 살피면 맞닿지 않고 틈이 있어 무언가를 넣고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석사라 이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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