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 옛날, 어떤 여인이 꿈에 선녀(仙女)로부터 봉황(鳳凰)을 받는 태몽을 꾼 후에 딸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의 이름을 봉선(鳳仙)이라고 지었습니다. 봉선이는 어려을 때부터 거문고 연주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천부적인 봉선이의 거문고 솜씨는 급기야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봉선이를 초청해서 그녀의 연주를 들으며 임금님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봉선이는 중한 병에 걸리고 말았고 임금님을 위해 마지막 힘을 다해 거문고를 연주했습니다. 손 끝에서 피가 나오는데도 연주를 그치지 않고 말이지요. 임금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봉선이의 손가락을 천으로 감싸 주었습니다. 그러나 봉선이는 결국 죽고 말았고, 후에 그녀의 무덤에서 피어난 꽃이 있었으니 바로 봉선화였습니다. 그 후로 이 꽃을 찧어서 천으로 손가락에 감싸고 있으면 붉은색으로 물이 든다는 전설...... 서양에도 봉선화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옛날 그리스의 한 여신이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쓰고 올림푸스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었던 여신은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죽어서 봉선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선화는 요즘에도 조금만 건드리면 열매를 터뜨려서 속을 뒤집어 내 보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아버지 혼준과 어머니 이씨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영후, 호는 난파, 본관은 남양이다. 난파는 7세때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근처에서 살면서 정동감리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서양 음악인 찬송가를 듣고 배웠으며 중앙기독교 청년회(YWCA)중학부 1학년대 이미 간단한 찬송가는 독보법을 스스로 해독하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난파는 이듬해인 1913년 9월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이던 조선정악전습소의 양악부에 입학하여 김인식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등을 배웠다. - (중략) - 한편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대한 교양면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일 처음 음악 평론도로서 후학도들에게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중 난파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1936년 도산 안창호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머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죄어 결성 요양원(현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해방의 서광을 보지 못한채 1941년 8월 30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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